대전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우리밀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우리밀을 재배하도록 설득했다.

미리 가격을 정하여 수매계약을 맺으며 재배면적을 넓혀갔다.

그렇게 계약을 맺은 농가가 700가구가 넘었고

면적도 무려 70만평이 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우리밀을 제품으로 가공하는 공장도 세웠다.

제분에서부터 제면까지 일괄생산라인을 갖춘 최첨단 공장이었다.

한마디로 한쪽끝에 원맥을 넣으면 저쪽 끝에서는 우동, 라면이 나오는 그런 공장이었다.

 

그렇게 우리밀사업이라는 것을 시작은 했지만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우선 원래 계획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금이 소요되었다.

담보가 될 만한 것은 다 끌어다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간신히 자금을 조달했다.

어렵사리 공장을 차리고 막상 우리밀국수를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생각과는 딴판으로 도무지 팔리지를 않았다.

가장 큰 문제점은 가격이었다.

수입밀에 비해 아무리 장점이 많다지만 몇 배나 비싼 가격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로는 신토불이, 우리 농촌살리기를 외쳤지만

막상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집을 때는 생각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역시 농촌살리기는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업적으로 접목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우리밀전문제조회사임을 포기하고 수입밀로 만든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농촌을 살린다는 식의 허영심과 자만심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다행히 수입밀제품을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워낙 업계최고수준의 설비를 갖추고 있었던 데다가

원래 국수원료로는 부적합한 우리밀과 씨름하면서 축적된 기술력이 있었다.

 

다양한 고정거래처가 성공적으로 발굴됐고 수출물량도 밀려들었다.

월 매출 9억원을 넘기면서  드디어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우리밀에 잘못 투자를 해서 망하나 했었는데

불과 창업 2년만에 흑자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너무도 기뻤다.

드디어 흑자가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때가 바로 97년 11월.............

 

빌어먹을.........

천신만고끝에 첫 흑자를 내자마자 IMF가 터진 것이었다.

저가제품인 인스탄트라면은 최고의 호황을 누린 반면,  

고가제품인 생라면, 생우동시장은 완전히 꽁꽁 얼어붙었다.

9억원을 넘었던 월매출은 2억원대까지 곤두박질을 쳤다.

밀가루를 비롯한 원부자재가격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폭등했다.

대리점들이 연달아 부도가 나면서 그나마 매출대금이 회수가 되지 않았다.

 

이쯤되면 대부분의 경영인들은 더 이상 버티려고 하지 않고 그냥 부도를 낸다고 했다.

그래야 약간이라도 자금이 남게 되고 그것으로 재기를 모도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라는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연히 버티다가 한 푼 남김없이 완전히 빨리고 나면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고의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짓은 도의적으로 할 수 없었다.

간신히 흑자를 냈었는데라는 미련이 남아서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고생을 해서 흑자를 냈는데 IMF따위때문에 무너질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견뎌내면 살아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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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끝났다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식당은 물론 집안의 모든 돈을 다 끌어다 공장에 쏟아부었다.

부모님의 집은 물론 친척어른의 여관까지 모조리 다 담보를 잡여 자금을 동원했다.

 

그렇게 1년여를 바둥거리다가

결국 말 그대로 한 푼도 남김없이 다 빨리고 나서야 부도가 났다.